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만 제국군 (문단 편집) == 역사 == 오스만 제국군의 역사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뉜다. 1300년대 초부터 점차 영토를 확장해나가며 1453년에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것을 1단계로 치며, [[메흐메트 2세]]가 본격적으로 통치한 1451년부터 [[지트바토로크 조약]]이 체결된 1606년까지가 2단계, 이후 1606년부터 술탄이 직접 지나치게 비대해진 예니체리를 강제 해체시켜버린 1826년까지를 3단계, 급격한 군대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1826년부터 1858년까지가 4단계, 그리고 마침내 불안정한 정세로 나날이 국력과 군사력이 동시에 쇠퇴해갔던 1861년[* 보통 술탄 [[압뒬아지즈]]의 즉위 원년인 1861년을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부터 1919년에 체결되어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인정한 무드로스 종전협약까지를 마지막 5단계로 치는 것이다. 오스만 군대 역사의 1단계인 12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건국 바로 직후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유목민들로 이루어진 기병들이었으며, 군장이나 무기도 통일되지 않았기에 정규병이라기보다는 약탈 집단에 조금 더 가까웠다. 이들을 1200년대 후반에 [[오스만 1세]]가 하나의 지휘계통 하에 통합하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점차 체계를 갖춘 병졸들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시기의 오스만 군대는 주로 기병 위주의 군대로, 활이나 투창 등을 사용하였으며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복한 곳의 토지들을 약탈하거나 아예 땅을 분배받는 형식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이 약탈이 끝난 것은 [[오르한 1세]]가 병사들에게 정식으로 봉급을 주는 것을 시작하고, 대대적으로 서구나 페르시아의 용병들을 고용했을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이 용병들은 오스만 장교에게 충성하는 한 이슬람으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다.] 일반 보병들은 '야야'(yaya)라고 불렀으며, 보조병 성격으로 기타 잡일들도 도맡아 하던 경보병들은 '뮈셀렘'(müsellem)이라고 불렀다. 14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초기 형태의 총을 구비한 총병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피야데 톱추'(piyade topçu)라고 부르는 총보병이 전문화되기 시작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제국들 중 처음으로 총기를 전격적으로 군대에 도입한 국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워낙 총기를 이른 시기에 도입했기에 당대의 오스만 군대는 동시대의 페르시아, 혹은 동로마, 서양의 군대를 압도할 수 있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이나 인도의 [[무굴 제국]] 등이 앞다투어 총기를 도입할 정도였다. 이들은 전장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여 [[바예지드 1세]] 재위기에 쇠락해가는 동로마의 군대를 끝장내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특히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시대에는 개종한 무슬림들로 만들어진 [[예니체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세계의 첫 상비 총보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의 메흐메트 2세는 본격적인 군사 개혁을 실시하였고, 이 시기가 오스만 군대의 2단계이다. 술탄은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과 동로마인들을 모아 만든 [[데브시르메]] 제도를 개정하여 본격적인 상비군을 편성하는 등 군대를 편제를 확립하였으며, 군대를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 중앙군을 '카프쿨루', 지방군을 '에얄레트'라고 불렀다. 또한 화기에도 신경을 써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큰 공헌을 한 대포 '다르다넬스 대포'를 확대 생산하였으며, 이 덕에 오스만 제국은 1800년대까지도 이 대포를 상시 운용하기도 했다. 1465년에는 본격적인 [[머스킷]]병들이 등장하였으며, 16세기에는 그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을 사용하여 머스킷 총을 생산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끊임없이 발전된 화기를 군대에 새로이 도입했던 덕분에, 오스만 군대는 몇 백년 간 서구 군대에 비하여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 아나톨리아를 여행한 중국 [[명나라]] 여행가 자오시젠이 '튀르크의 총기가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다. 이같은 화력의 우위, 그리고 예니체리 부대의 강력한 조직력과 지휘능력 등이 합쳐지면서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유럽의 웬만한 군대들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참고로 세계 최초의 [[군악대]] 역시 16세기의 예니체리 부대에서 '메흐테르'라고 이름으로 처음으로 창설된 것이다. 3단계에 해당하는 1606년부터 1826년까지의 핵심 주제는 기존의 군대였던 예니체리들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600년대까지만 해도 예니체리는 여전히 제국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으며, 조직력도 강했고 여전히 군의 기강도 어느 정도는 살아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예니체리들이 권력을 잡고 심지어는 술탄마저도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기 시작했고, 군대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예니체리들은 군대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특권층이 되어 향락에 빠져들었고, 이전의 군사적 규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대의 술탄들도 할 수 있는 선에서 프랑스 장교들을 영입하여 프랑스식 군사 교육을 들여오고, 포병 창설, 보스포루스 해협에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군사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이미 근본적인 병폐가 되어버린 예니체리들의 일소 없이는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야심차게 추진한 해군 창설과 새로운 병종 등은 기존의 군대에 제대로 흡수되기는커녕 배척당하는 게 흔했고, 기껏 영입해온 프랑스 장교들은 군조직 내에서 냉대를 받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서구의 근대식 군대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벤치마킹했던 [[셀림 3세]] 시기에 유럽식 군사교육이 이루어지고 [[니자므 제디드|신군]]이 창설되는 등 조금이나마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소규모의 제대로 훈련된 근대식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식 군대는 1만 명이 채 되지 못했고, 동시대 유럽 열강들이 몇십만 명에 달하는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게다가 셀림 3세가 그의 개혁정책에 반발한 예니체리들에 의해 1808년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면서 군대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를 교묘한 방법으로 속여 넘기다가 결국 예니체리 철폐를 강행, 성공하였고, 이 시기부터를 오스만 제국군 역사의 4단계로 본다. 한편 먼 남쪽에 있던 이집트 지역에서는 [[무함마드 알리 파샤]] 총독이 사실상 제국에 반기를 들고 자치적으로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급박해진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가 사라진 잔재 위에 대대적인 근대식 군대 창설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 본격적 근대식 군대를 운용했던 1861년부터를 오스만 제국군의 마지막 시기인 5단계로 치며, 이 시기 오스만 군대는 타 유럽 열강들에 비하여도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근대식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주로 [[발칸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활약하였으며, 프랑스식 군사교육체계를 더욱 효율적인 독일식 군사교육체계로 바꾸기도 했다. 다만 술탄들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국방비를 삭감하고,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제대로 된 훈련과 지휘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군사들의 기강이 끝없이 해이한데다 결정적으로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탓에 제국 자체가 붕괴하면서 오스만 제국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